튀르키예의 6·25전쟁 참전

튀르키예는 6·25전쟁 당시 유엔군으로 참전한 국가 가운데 빠르게 여단급의 부대 파병을 공식 결정한 국가 중 하나이다. 총 세 차례에 걸쳐 대한민국에 21,212명의 병력을 파병하였으며, 튀르키예 여단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최전선에서 치열한 전투를 수행하였다.


먼 곳에서 온 결단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발발하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의 남침을 침략 행위로 규정하고 회원국들에게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였다.

  • 튀르키예 외교부 한국 문제 관련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 문서(1950)
    (2025-TR-02-DC-D-00003)

튀르키예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따라, 연합군의 주요 일원으로서 전투 병력을 파병하겠다는 뜻을 유엔 사무총장에게 공식 통보하였다. 이는 6·25전쟁이 단순한 지역 분쟁이 아니라 국제사회의 평화 질서를 지켜야 할 전쟁이라는 인식을 반영한 결정이었다.


튀르키예 여단의 창설

파병 결정 이후, 튀르키예는 신속히 대한민국으로 파견할 부대를 편성하였다. 앙카라에서는 유엔군 소속 튀르키예군 사령부(Birleşmiş Milletler Türk Silahlı Kuvvetleri Komutanlığı)가 창설되었고, 병력 선발, 장비 보급, 건강 검진, 훈련 등 전 과정이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

  • 튀르키예군 사령부의 한국 파견 준비 및 조직 관련 문서 (ATASE, 110-9-1-15, 1-0-41)

첫 파병 부대, 튀르키예 제1여단

1950년 9월, 첫 파병 부대인 튀르키예 제1여단 5,090명이 앙카라를 떠나 남부 항구 이스켄데룬(Iskenderun)으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약 21일간의 항해 끝에 1950년 10월 부산항에 도착하여 유엔군에 합류하게 되었다. 멀고 낯선 나라로 향하는 이 길은 자유를 지키기 위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 미 해군 수송선 USS General Haan을 타고 한국으로 향하는 튀르키예 제1여단 장병들 사진(1950)
    (2024-TR-02-PF-D-00139)

군우리 전투 – 가장 치열했던 순간

1950년 11월, 군우리 전투는 튀르키예군이 참전한 전투 가운데 가장 치열했던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튀르키예 여단은 중공군의 압도적 공격 속에서도 후퇴하는 유엔군의 퇴로를 확보하며 결사적으로 싸웠다.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이 전투는 튀르키예군의 용기와 희생을 가장 잘 보여주는 순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금양장리 전투 – 반격의 전환점

1951년 1월, 금양장리 전투는 군우리 전투 이후 침체되었던 전황을 다시 뒤집은 전투였다. 튀르키예 여단은 수적으로 우세한 중공군의 공격에 맞서 적극적인 반격에 나서 전선을 사수했다. 총검 돌격과 치열한 근접전 끝에 적을 후퇴시켰고, 유엔군 전선의 붕괴를 막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전투의 공로로 튀르키예 여단은 미국 정부로부터 우수부대훈장을 수여받았다.

  • 튀르키예 제1여단장 타흐신 야즈즈 준장에게 은성훈장을 수여하는 월튼 워커 장군 사진(1950)
    (2024-TR-02-PF-D-00045)

베가스 전투 – 정전 직전의 최후 방어

1953년 5월, 전선 재배치에 따라 튀르키예 여단은 미 제1해병사단이 맡고 있던 강원도 철원 일대의 ‘베가스(Vegas)’, ‘엘코(Elko)’, ‘카슨(Carson)’ 등 주요 전초진지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전투에서 튀르키예군은 수적 열세 속에서도 끝까지 고지를 사수하며 유엔군 방어선을 지켜냈다.

  • 00:09:33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진행되는 동안
    ~
    00:17:22
    하룻밤 자고 나서
    다시 전선으로 복귀했습니다

    네즈뎃 야즈즈오울루(Necdet Yazicioglu) 구술영상
    (2023-KR-02-OH-D-00042)

전쟁고아와 앙카라학교

튀르키예 군인들은 부모를 잃고 거리와 기차역을 떠돌던 전쟁고아들을 보호하고 돌보기도 하였다. 많은 부대가 아이들을 직접 맡아 함께 생활하며 이름을 지어주고 먹을 것을 나누며 가족처럼 지켰다.


튀르키예 군인들의 실천은 앙카라학교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수원에 위치한 앙카라학교는 전쟁 중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보호하고 교육하기 위해 세워진 학교로, 전장의 한가운데서 아이들에게 배움과 희망을 이어준 상징적인 공간이다.


전쟁의 대가

튀르키예군은 6·25전쟁에서 전사 900명 부상 1,155명, 포로 244명이라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숫자 하나하나에는 누군가의 아들이, 형제가, 아버지가 있었다.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튀르키예 사람들은 ‘순교자(Şehit)’로 기억하고 있다.


한국과 튀르키예, 피로 맺어진 형제

전쟁이 끝난 뒤, 한국과 튀르키예 사람들은 서로를 ‘Kan Kardeş(피로 맺어진 형제)’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같은 전장에서 생명을 걸었던 이들이 서로에게 붙인 이름이자, 희생 위에 세워진 연대의 증표였다.

  • 00:18:03
    한국의 젊은이들이나 후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나요?
    ~
    00:18:38
    이 집도 너희 것이니
    살고 싶으면 영원히 살라고 할 거에요

    유수프 알툰추(Yusuf Artuc)
    구술영상(2023-KR-02-OH-D-00034)

참고문헌
  • 박동찬, 『통계로 본 6·25전쟁』, 군사편찬연구소, 2014
  • 손규석·조성훈 ·김상원, 『6·25전쟁과 UN군』, 군사편찬연구소, 2015
  • Nadav Solomonovich, “The Turkish Republic’s Jihad? Religious Symbols, Terminology and Ceremonies in Turkey during the Korean War, 1950–1953.” Middle Eastern Studies (2018)
  • İbrahim Karataş, “The Discourse of Brotherhood in Turkish Foreign Policy during the AK Party Era,” Üsküdar Üniversitesi Sosyal Bilimler Dergisi, no. 12 (2021)

작성자 : 한지명